국내여행

정여창과 오봉 이야기

최이랑 2015. 8. 5. 11:32

안의 밤숲 가기 전 들판에 다섯개 봉우리가 있습니다.

이를 오봉이라하며 이에 얽힌 전설같은 실화가 있는데

현장 느티나무 아래 이 실화를 새긴 비가 있습니다.

 

이 비는 오봉을 정비하면서 2005년 7월에 세운 것으로

이 방의 "정여창선생과 아리랑고개"라는 글이 있는데

이 글과는 조금 다른 내용입니다.

이 비의 글을 옮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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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안의현의 남쪽에 내삼봉과 외오봉이 있었는데 옛날부터 전해오는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 이 봉우리들은 안의현민들의 인명과 재물을 보호라기 위하여 이루어져 있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안의현에는 부자와 휼륭한 인물이 많았으며 농업주업으로 하는 안의현민들도 이들 봉우리들의 덕분으로 태평성대를 누리는 것으로 믿고 매년 정월 대보름날이 되면 달집을 짓고 둥근달을 향하여 절을 하고 일년의 행운과 풍년을 기약하며 산봉우리들에 제를 올리는 풍습이 있었다. 그런데 제를 올릴 때 지나가는 나그네를 강제로 끌어다 절을 시키며 웃음거리로 만드는 나쁜 풍습도 있었다.

 

하루는 지곡면 개평 출신 정일두선생이 정월대보름날 해질 무렵에 처가인 서하면 봉전으로 가기 위해 말을 타고 역마촌(지금의 관북)에 이르렀을 때 마침 제를 올리고 있던 촌민들이 때마침 그 앞을 지나가는 정일두선생을 강제로 말에서 끌어내려 절을 시키고 촌민들의 웃음을 자아내게 하였다. 그러나 정일두선생의 입장에서는 영문도 모르고 모욕을 당한 것이 가슴깊이 한이 맺히고 촌민들의 웃음거리가 된 치욕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다.

 

그 후로 정일두 선생은 학문에 전념하여 마침내 과거에 급제하여 안의현감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정일두선생은 안의현감으로 부임하자 즉시 진수산(지금의 대밭산)의 허리를 자르고 내삼봉을 헐고 외오봉을 파괴해 버렸다. 외오봉을 파괴하니 오리봉(지금의 오리정)에 있던 학들이 모두 남쪽으로 날아가 버리고 오봉의 옆에 있으며 젖이 부족한 산모가 빌면 영험을 얻는다는 풍덕샘에서는 용마가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그리하여 내삼봉과 외오봉이 헐린 이후부터는 안의현의 재물은 점점 지곡쪽으로 흘러가 버리고 세월이 흘러 정일두 현감이 임기가 끝나고 이상학현감이 부임하였을 때 안의현민들은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한결같이 흩어진 내삼봉과 외오봉을 세울 것을 건의하여 다시 세우니 지금의 오봉이다. 그 뒤로부터는 안의현에 다시 학이 날아들고 부가 넘치게 되었으니 산수의 아름다운 정기를 어어 받아 자연에 어울리게 자리 잡은 정자에서 심신을 단련함으로써 인심 좋은 고을이 되었다고 전하고 있으나, 현재 그 흔적이 퇴색되어 금번 오봉정비업으로 재단장하게 되었음. 2005.7.

  

 

오봉정비 비석이 있는 느티나무

 

 

정여창(鄭汝昌 )

 

1450(세종 32)∼1504(연산군 10).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하동(). 자는 백욱(), 호는 일두()·수옹(). 판종부시사 지의()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전농시사 복주()이며, 아버지는 함길도병마우후 증한성부좌윤 육을()이다. 어머니는 목사 최효손()의 딸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혼자서 독서에 힘쓰다가 김굉필()과 함께 김종직()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논어≫에 밝았고 성리학의 근원을 탐구하여 체용()의 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1480년(성종 11)에 성종이 성균관에 유서를 내려 행실을 닦고 경학에 밝은 사람을 구하자 성균관에서 그를 제일로 천거하였다.

 

지관사 서거정()이 그를 경연에서 진강하게 하려 했으나 나가지 않았다. 1483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8월에는 성균관 상사()의 동렬()에서 그를 이학()으로 추천하였다. 1486년 어머니가 이질에 걸리자 극진히 간호했으며, 어머니가 죽자 최복()을 벗지 않고 3년 동안 시묘하였다.

 

그 뒤 지리산을 찾아가 진양의 악양동() 부근 섬진()나루에 집을 짓고 대와 매화를 심으며 여기에서 평생을 마치고자 하였다. 1490년 참의 윤긍()에 의해 효행과 학식으로 추천되어 소격서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자식의 직분을 들어 사양하였다.

 

성종은 그의 사직상소문의 끝에 “너의 행실을 듣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행실을 감출 수 없는데도 오히려 이와 같으니 이것이 너의 선행이다.”라고 쓰고 사임을 허가하지 않았다. 그 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예문관검열을 거쳐 시강원설서가 되었는데 이 때 정도()로써 동궁(연산군)을 보도했으나 동궁이 좋아하지 않았다.

 

1495년(연산군 1) 안음현감()에 임명되어 백성들의 질고()가 부렴()에 있음을 알고 편의수십조(便)를 지어 시행한 지 1년 만에 정치가 맑아지고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들었다.

감사는 해결하기 어려운 옥사가 있으면 그를 만나서 물어본 뒤에 시행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판결에 의문나는 것이 있으면 원근에서 그를 찾아와 판결을 받았다.

 

민사()를 돌보는 여가로 고을의 총명한 자제를 뽑아 친히 교육하였고, 춘추로 양로례()를 행하였다. 1498년 무오사화 때 종성()으로 유배, 1504년 죽은 뒤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되었다. 중종대에 우의정에 증직되었고, 1610년(광해군 2) 문묘에 승무()되었다.

 

나주의 경현서원(), 상주의 도남서원(), 함양의 남계서원(), 합천의 이연서원(), 거창의 도산서원(), 종성의 종산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일두유집 ≫이 있다. 시호는 문헌()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